다부치 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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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부치 고이치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포수와 지명타자로 활약했으며, 홈런 아티스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호세이 대학 시절 '호세이 트리오'로 불리며, 1968년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하여 신인왕을 수상했다. 한신,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1975년에는 홈런왕을 차지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 코치, 감독으로 활동했고, 2020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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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치 고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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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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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감독 및 타격 코치 (과거 포수, 1루수, 지명타자 / 감독)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출생일 | 1946년 9월 24일 |
출생지 | 일본, 도쿄도, 도시마구 |
선수 경력 | |
데뷔 리그 | NPB |
데뷔일 | 1969년 4월 12일 |
데뷔 팀 | 한신 타이거스 |
최종 출장일 | 1984년 9월 29일 |
최종 팀 | 세이부 라이온스 |
선수 | 한신 타이거스 (1969–1978) 세이부 라이온스 (1979–1984) |
감독/코치 경력 | |
감독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0–1992) |
코치 | 한신 타이거스 (2002–2003)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011–2012) |
기록 | |
안타 | 1532 |
홈런 | 474 |
볼넷 | 823 |
타점 | 1135 |
타율 | .260 |
장타율 | .535 |
수상 | |
신인왕 | NPB 신인왕 (1969) |
홈런왕 | 센트럴 리그 홈런왕 (1975) |
베스트 나인 | 5× 센트럴 리그 베스트 나인 (1972–1976) |
골든 글러브 | 2× 센트럴 리그 골든 글러브 (1973, 1974) |
기록 (세부) | |
연속 타석 홈런 | 4연속 타석 홈런 (1973) |
연속 출루 | 13연속 출루 (1974) |
명예의 전당 | |
종류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헌액 년도 | 2020 |
2. 프로 입단 전
마이니치 신문에 근무했던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82] 양친과 누나를 포함한 4인 가족이었으며, 도시마구립 다카다 중학교 시절에 야구를 시작하여 2학년 때 5번 타자로 활약했다. 호세이 대학 제1 고등학교(현재의 호세이 대학 중학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포수가 되면서 4번 타자로도 뛰었다. 3학년 때인 1964년에는 하계 고시엔 대회의 도쿄 도 대회에서 팀은 준준결승까지 진출했지만 니혼 대학 제2 고등학교에게 9회 끝내기 패배를 당해 고시엔 대회에는 나가지 못했다.
1968년 드래프트에서 한신 타이거스의 1차 지명을 받은 다부치는 호세이 대학 야구팀 동료인 도미타 마사루, 야마모토 코지와 함께 "호세이 트리오"로 불렸다. 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외에는 다른 팀에 입단하지 않겠다고 언급했었지만[4], 결국 한신에 입단하여 프로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고교 졸업 후 호세이 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하면서 1학년이던 1965년 봄부터는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 출전했다. 같은 해에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6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도쿄 6대학 선발팀이 파견됐다) 선수로 발탁돼 일본의 우승에 기여했다. 이때 당시의 주전 포수는 와세다 대학 소속인 오쓰카 야스오였지만 2년 후 같은 대회에서 중심 타자로서 활약하는 등 팀의 완전 우승을 장식했다. 야마나카 마사타케 등과 배터리를 구성하여 재학 중 세 차례의 리그 우승을 경험했으며 리그 통산 97경기에 출장, 342타수 94안타, 타율 2할 7푼 5리, 78타점을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을 세 차례나 선정되기도 했다. 야마모토 고지, 도미타 마사루와 함께 ‘호세이 대학 3인방’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며 3학년 봄에는 그때까지의 홈런 기록(8개)을 재빨리 경신하는 등 통산 홈런 개수를 22개로 늘렸고 1997년에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다카하시 요시노부에 의해서 기록을 깰 때까지의 리그 기록이었다.[83]
196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1순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는데 드래프트 회의를 앞두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지명이 확실시되면서 다부치 본인도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고 여겨졌지만 야마모토 고지[85]나 간사이 지방 출신의 도미타를 지명할 것이라고 소문이 나있던 한신이 ‘도쿄에 있는 구단이라면 또 모르지만 간사이 지방의 구단은 좀…’[85]이라고 고민하던 다부치를 1순위로 지명했다. 드래프트 전에 요미우리 구단 관계자와 회식을 가졌고 “너에게는 등번호 2번을 준비하고 있다”라는 말을 듣고 감격했지만 드래프트 지명이 예상 외의 결과가 나온 바람에 낙담했다.[84] 한편, 포기할 수 없는 요미우리측도 다부치를 한 번 한신에 입단시켜 후에 요미우리로 이적시키는 소위 ‘삼각 트레이드’를 제안했고 또한 비밀리에 다부치와의 면담을 획책했지만 한신측은 트레이드를 거부했다. 요미우리 입단이 무산되면서 다부치는 결국 한신과 입단 계약을 맺었다.[85]
3. 프로 야구 선수 시절
이후 다부치는 한신과 세이부에서 활약하며 여러 기록과 수상을 남겼다. 선수 경력은 다음과 같다.3. 1. 한신 타이거스 시절 (1969년 ~ 1978년)
한신에 입단한 다부치는 강한 어깨와 타격을 가진 포수로서 1969년 입단 첫 해부터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했다. 그해 정규 시즌에서 22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포수로서는 처음으로 신인왕을 수상했다.[86] 신인으로서 시즌 22홈런은 2021년에 사토 테루아키가 기록을 깰 때까지 구단 기록이었다.[19]
1970년 8월 2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서 상대 투수 소토코바 요시로에게 왼쪽 관자놀이에 사구를 맞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86] 귀에서 피가 많이 나올 정도로 부상 상태가 심각했고 곧장 구급차로 병원에 이송됐다.[20] 이 부상은 '다부치의 체질이 이것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라고 말할 정도로 큰 부상으로 알려졌고, 다음 시즌까지 이어졌다. 그 무렵 타격 폼을 '한발타법'(一本足打法일본어)으로 바꾼 후부터 비거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1972년에는 34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팀 동료인 에나쓰 유타카와 콤비를 이뤄 '''황금 배터리'''(黄金バッテリー일본어)라는 애칭이 붙게 됐다.
1971년에는 급성 신장염을 앓아 입원 치료를 받았다. 6월 17일 복귀했지만, 당분간 병원에서 구장으로 통원했고, 23일에 겨우 퇴원했다.[22] 이 해에는 주로 1루 또는 외야로 출전했고, 포수로서는 1경기만 출장했다.
1973년 4월부터 5월에 걸쳐 요미우리를 상대로 한 팀에서 7타수 연속 홈런이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날짜 | 구장 | 상대 투수 | 이닝 | 내용 | |
---|---|---|---|---|---|
1 | 4월 26일 | 고라쿠엔 | 세키모토 시주 | 6회 | 좌익수 3점 홈런 |
2 | 4월 26일 | 고라쿠엔 | 스가와라 카츠야 | 8회 | 좌익수 4호 3점 홈런 |
3 | 4월 26일 | 고라쿠엔 | 스가와라 카츠야 | 9회 | 5호 3점 홈런 |
4 | 5월 9일 | 고시엔 | 다카하시 요시마사 | 2회 | 좌익수 9호 솔로 홈런 |
― | 5월 9일 | 고시엔 | 다카하시 요시마사 | 4회 | 사구 |
5 | 5월 9일 | 고시엔 | 다카하시 요시마사 | 7회 | 좌익수 10호 2점 홈런 |
6 | 5월 9일 | 고시엔 | 다카하시 요시마사 | 9회 | 중견수 11호 솔로 홈런 |
7 | 5월 10일 | 고시엔 | 다카하시 카즈미 | 1회 | 좌익수 12호 2점 홈런 |
같은 해 9월 9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야쿠르트 야스다 다케시가 이어가던 연속 이닝 무사사구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 경신을 81개로 멈췄다.[23]
1974년 아버지가 사망했고, 당일 경기 전에 부고 전보를 받았다. 가네다 마사야스 감독은 "경기에 신경쓰지 말고 돌아가라"라고 했지만, 다부치는 출전을 강행하여 히라마쓰 마사지에게서 홈런 2개를 날렸다.
1975년에는 오 사다하루의 14년 연속 홈런왕 타이틀을 저지하는 43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첫 타이틀을 획득했다.[87] 1974년, 다부치는 자신의 최다인 45홈런(최초의 시즌 40홈런)을 기록했지만 4개 차이로 홈런왕을 놓쳤다. 그러나 1975년에는 부상으로 시즌 준비가 늦었던 오 사다하루를 제치고 시즌 개막 이후부터 홈런을 계속 때려내 최종적으로 10개 차이로 타이틀을 획득했다. 몸에 맞는 볼로 인해 왼손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른손만으로 친 홈런도 포함돼 있다.[24]
1978년 시즌 종료 후 세이부 라이온스로 트레이드됐다. 한신에서 다부치와 후루사와 겐지 등 2명, 크라운에서 마유미 아키노부, 다케노우치 마사시, 와카나 요시하루, 다케다 마사후미의 4명을 교환하는 대형 트레이드였다. 이 트레이드는 심야에 호출되어 통보되는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구단 측의 "이번에 가는 세이부의 네모토 감독은 좋은 감독이니까 가서 공부 잘 하고 와라"는 설득에 다부치는 "그럼 (한신의) 블레이저 감독은 좋은 감독이 아닙니까?"라는 말을 되받아쳤다.
3. 2.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1979년 ~ 1984년)
1979년 세이부로 이적한 후 몸을 다시 단련했고, 1980년에는 1루수로 전향함과 동시에 지명타자로도 활약하며 5년 만에 40홈런 이상(43홈런)을 기록했다. 이는 세이부 구단 사상 최초의 40홈런이기도 하다. 1982년과 1983년에는 한신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경험했다. 특히 1983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일본 야구계의 최고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1983년에는 시즌 중반까지 30홈런을 기록하며 독주했고, 센트럴·퍼시픽 양대 리그 홈런왕은 확실시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그해 7월에 긴테쓰 버펄로스의 투수 야나기다 유타카에게 몸에 맞는 볼을 맞으면서 왼쪽 손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당해 꿈이 무산됐다.
이듬해 1984년 시즌을 끝으로 16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4. 은퇴 후
1984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1985년부터 1989년까지 TBS (텔레비전·라디오)의 야구 해설위원을 맡았다. 1990년 스기우라 다다시의 후임으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으로 취임했다. 1993년부터 2001년까지 다시 TBS 해설자를 맡았다.
2002년 호시노 센이치의 감독 취임에 따라 한신 타이거스 수석 겸 타격 코치로 발탁되었고, 이듬해인 2003년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2003년 시즌 종료 후 호시노 감독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자, 다부치도 함께 팀을 떠났다.
2004년 TBS 야구 해설위원으로 복귀했고, 스포츠 닛폰 평론가도 겸했다. 2007년 베이징 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호시노가 취임하면서, 수석 겸 타격 코치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대표팀은 4위로 부진했다.
2011년 호시노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수석 코치 겸 타격 코치로 부임했다. 그러나 팀 타격 부진으로 2011년 6월 5일 수석 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고, 2012년에도 수석 코치를 맡았지만, 2012년 시즌 후 라쿠텐을 떠났다.[108]
2013년 TBS TV·라디오 야구 해설자, 스포츠 닛폰 야구 평론가로 복귀했다.
;지도자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 (1990년 ~ 1992년)
- 한신 타이거스 1군 타격 수석 코치 (2002년 ~ 2003년)
- 베이징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 수석 코치 겸 타격 코치 (2007년 ~ 2008년)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1군 수석 코치 겸 타격 코치 (2011년)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1군 수석 코치 (2011년 6월 5일 ~ 2012년)
;해설자
- TBS 야구 해설위원 (1985년 ~ 1989년, 1993년 ~ 2001년, 2004년 ~ 2010년, 2013년 ~ )
- 스포츠 닛폰 평론가 (1993년 ~ 2001년, 2004년 ~ 2010년, 2013년 ~ )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1990년 | 다이에 | 6위 | 130 | 41 | 85 | 4 | .325 | 40.0 | 116 | .251 | 5.56 | 44세 |
1991년 | 5위 | 130 | 53 | 73 | 4 | .421 | 29.0 | 152 | .253 | 4.74 | 45세 | |
1992년 | 4위 | 130 | 57 | 72 | 1 | .442 | 24.0 | 139 | .258 | 4.60 | 46세 | |
통산: 3년 | 390 | 151 | 230 | 9 | .396 | B클래스: 3회 |
- 1990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5. 플레이 스타일
다부치는 '홈런 아티스트'(ホームラン・アーチスト일본어)라는 별명처럼 뛰어난 장타력을 가진 선수였다. 바깥쪽 공에 강했고, 왼팔이 오른팔보다 3cm가량 긴 신체적 특징이 장타력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타석에서는 냉정함을 유지하며 볼넷을 많이 골라내는 선구안도 뛰어났다. 통산 홈런 474개는 역대 11위(2015년 시즌 도중 기준)이며, 홈런 1개를 치는 데 필요한 타수가 매우 적었다.
1983년에는 타격 부진으로 82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음에도 30홈런을 기록, 프로 야구 최초로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하고도 30홈런'을 달성했다. 이 기록은 2012년 시즌 종료 시점에서 다부치를 포함해 6명이 기록했지만, 다부치 외에는 모두 외국인 선수였다.
프로 데뷔는 다이요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에나쓰 유타카의 대타로 출전, 히라마쓰 마사지를 상대했으나 슈토에 대처하지 못하고 삼진을 당했다. 이후 슈토를 극단적으로 의식하게 되었고, 젊은 시절에는 홈런을 치면 구종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때린 것은 슈토'라고 답하곤 했다.
요미우리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요미우리가 'V9'을 달성한 1973년에는 시즌 37홈런 중 16개를 요미우리전에서 기록했고, 같은 해 한 경기 3홈런을 두 차례 기록했는데, 모두 요미우리전이었다.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5경기 연속 9홈런, 7타수 연속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시이 히사이치의 《힘내라!! 다부치군!!》에서는 짧은 다리로 ‘또박또박’ 무겁게 달리는 모습이 그려져 '타부런'(다부치의 런닝 홈런)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호시노 센이치에 의하면 호세이 대학 시절 다부치는 빠른 발을 가졌었다. 나가시마 시게오의 도쿄 6대학 기록을 런닝 홈런으로 달성할 뻔했으나 '실례'라는 이유로 3루에서 멈춘 적도 있다. 프로에서는 런닝 홈런은 없었고 도루도 18개에 불과했지만, 이는 비만보다는 부상의 영향이 컸다.
현역 시절 삼진이 적었고, 한 시즌에 100개 이상 삼진을 기록한 적은 없다. 공식전에서 희생 번트는 한 개도 없었다.
노무라 가쓰야가 거울 앞에서 자세를 체크하는 다부치에게 뭘 하고 있느냐고 묻자, '나는 자세만 정해지면 때려낼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노무라는 "자세는 중요하지만 좋은 자세만 되면 잘하는 건 다부치밖에 없다"며 기가 막혔다고 한다.[109]
세이부 시절 감독 히로오카 다쓰로는 "홈런만 때려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했다.[111]
일본 야구계에서 통산 400홈런 이상, 2000안타 미만인 일본인 선수는 다부치와 야마사키 다케시 둘뿐이다(외국인 선수 포함 시 터피 로즈까지 세 명).
1975년경 한신은 다부치를 비롯해 에가와, 와다 토오루, 토오이 고로 등 스모 선수 같은 비만 체형 선수가 많아 "스모 방"이라고 조롱받았다. 이에 나카가와 타쿠지가 도쿄 교육대학에서 스카우트되어 트레이닝 코치로 취임했다.[71]
노무라 가쓰야는 "포수 출신 감독 실패 사례"로 다부치를 자주 언급했고,[70] 여러 저서에서 다부치의 포수 및 지도자 능력을 혹평했다.
5. 1. 타격
'홈런 아티스트'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장타력과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는 홈런이 특징이었다.[86] 바깥쪽 공에 강했으며, 왼팔이 오른팔보다 3cm 정도 더 긴 신체적 특징이 장타력에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86] 뛰어난 선구안을 바탕으로 많은 볼넷을 얻어냈으며, 통산 홈런 474개는 역대 11위(2015년 시즌 도중 기준)의 기록이다.[86] 홈런 1개를 치는 데 필요한 타수가 적은 것이 특징이며, 통산 홈런율은 오 사다하루에 이어 역대 2위이다.[86]- 300홈런 이상으로 홈런률이 15 이하의 선수(2015년 8월 10일 현재)
성명 | 홈런 | 경기수 | 타수 | 홈런률 |
---|---|---|---|---|
오 사다하루 | 868 | 2381 | 9250 | 10.66 |
다부치 고이치 | 474 | 1739 | 5881 | 12.41 |
알렉스 카브레라 | 357 | 1239 | 4510 | 12.63 |
나카무라 다케야 | 303 | 1172 | 3943 | 13.01 |
터피 로즈 | 464 | 1674 | 6274 | 13.52 |
마쓰이 히데키 | 332 | 1268 | 4572 | 13.77 |
나가이케 도쿠지 | 338 | 1449 | 4872 | 14.41 |
기요하라 가즈히로 | 525 | 2338 | 7814 | 14.88 |
오치아이 히로미쓰 | 510 | 2236 | 7627 | 14.95 |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강한 면모를 보였으며, 1973년에는 시즌 37개의 홈런 중 16개를 요미우리전에서 기록했다. 같은 해에 한 경기 3개의 홈런을 두 차례나 기록했는데, 이 역시 모두 요미우리전에서 나온 기록이었다. 또한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5경기 연속 9개 홈런, 7타수 연속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삼진이 적은 선수로 알려져 있으며, 한 시즌에 100개 이상의 삼진을 기록한 적이 없다. 공식전에서 희생 번트는 한 번도 기록하지 않았다.
5. 2. 수비
젊은 시절에는 큰 체격에도 불구하고 포수로서 민첩하게 움직였으며, 대학 시절에는 빠른 발을 가진 다카다 시게루와의 대결이 유명했다. 프로에 입문한 후에도 공을 잡은 후 2루로 송구하는 속도가 매우 빨랐고,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20대에는 4할 이상의 도루 저지율을 기록했다.[68]연도 | 경기 | 도루 시도 | 도루 허용 | 도루 실패 | 저지율 |
---|---|---|---|---|---|
1969 | 82 | 58 | 27 | 31 | .534 |
1970 | 88 | 67 | 30 | 37 | .552 |
1971 | 1 | 0 | 0 | 0 | - |
1972 | 114 | 109 | 50 | 59 | .541 |
1973 | 114 | 79 | 38 | 41 | .519 |
1974 | 123 | 96 | 60 | 36 | .375 |
1975 | 128 | 109 | 65 | 44 | .376 |
1976 | 118 | 74 | 46 | 28 | .378 |
1977 | 71 | 65 | 49 | 16 | .246 |
1978 | 79 | 65 | 44 | 21 | .323 |
1979 | 25 | 45 | 34 | 11 | .244 |
1984 | 1 | 0 | 0 | 0 | - |
통산 | 944 | 767 | 443 | 324 | .422 |
그러나 1970년 소토코바 요시로에게서 받은 사구의 영향으로 청력이 나빠지고 체질이 변화(비만)하면서 플레이가 느려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신 시절 평범한 포수 플라이를 놓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당시 한신에는 쓰지 요시노리, 쓰지 야스히코 등 수비에 강점을 가진 포수들이 있어서 부상 이후에는 1루수나 외야수로도 출전했고, 세이부로 이적한 후에는 주로 지명타자로 출전했다. 에나쓰 유타카는 다부치가 포수로서 대성하지 못한 이유를 대범한 성격 탓으로 보았다.
5. 3. 그 밖에
다부치는 매우 대범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다. 에나쓰 유타카는 다부치의 인간성에 대해 "다부치 만큼은 순수하고 표리가 없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112] 경기 전에는 상대 팀 선수와 가능한 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이 마주치면 상대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정상적인 승부를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112]또한, 다부치는 사인 훔치기와 같은 비겁한 행동을 싫어하고 정정당당한 승부를 중시했다. 코치가 사인을 숨기라고 말해도 "그렇게 교활한 짓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6. 에피소드
다부치는 1977년부터 입단 당시에 비해 살이 찐 자신의 모습을 모티브로 한 만화 《힘내라!! 다부치군!!》(이시이 히사이치 작)이 연재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113] 이 만화는 단행본으로도 발매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79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탤런트 단칸이 에나쓰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극장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을 때 에나쓰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는데, "자신을 모델로 한 영화인데 관객이 너무 적다"며 영화 내용이 아닌 관객 수에 대해 화를 냈다고 한다. 하지만 2021년 유튜브 프로 야구 OB 클럽 공식 채널에서 에나쓰와 다부치의 대담에서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다부치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부정했고, 에나쓰와 함께 어이없어했다.[73]
2020년 1월 다부치가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을 때, 이시이는 "다부치 군의 코멘트"로 "명예의 전당 헌액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두 번 다시 발목을 잡거나 하지 않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라고 축하했다.[74]
6. 1. 《힘내라!! 다부치군!!》
1977년부터 이시이 히사이치가 다부치 고이치를 모티브로 한 만화 《힘내라!! 다부치군!!》을 연재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113] 이 만화는 단행본으로도 발매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1979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만화 속에서는 다부치의 좋은 파트너로서 야쿠르트의 야스다 다케시, 오야 아키히코, 히로오카 다쓰로도 캐릭터로 등장했다.[113]다부치는 이 만화의 열성팬이었으며, 자신을 모델로 한 만화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NHK 교육 텔레비전의 《YOU》(1984년)에 출연했을 때 "만화까지 써서 응원해주다니 정말 기쁘다. 원작자를 만나 답례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다부치가 현역에서 은퇴한 다음 해인 1985년 1월 9일에는, '야구계의 슈퍼 히어로 은퇴에 바친다!'라는 부제로 극장 첫 번째 작품이 닛폰 TV 《수요 로드쇼》에서 기념 방송으로 제작됐다. 다부치의 현재 부인은 야구에 전혀 흥미가 없었고 이 만화를 통해 다부치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훗날 TV 프로그램에서 “이 만화에는 불만따위는 전혀 없고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다부치와의 결혼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6. 2. 등번호 '22'
한신과 세이부 시절 등번호 22번을 사용했다(주장을 맡았던 1968년에 '10'번을 붙인 것 외에도 호세이 대학 시절에도 착용했었다). 다부치는 22라는 숫자와도 인연이 있어 대학에서의 통산 홈런 개수, 신인 시절인 1969년 시즌 홈런 개수가 모두 22개였다.[33]6. 3. 가족·친척·교우 관계
부인은 전직 여배우인 자넷 핫타이다. 소위 ‘속도위반 결혼’이어서 다부치는 당시 이혼 경력도 있고 나이도 35세였기 때문에 세간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114]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두 명이 있으며, 장남은 후지 TV 아나운서인 다부치 유쇼이다.에모토 다케노리와는 호세이 대학의 1년 후배로, 에모토의 한신 이적 후에는 학생 시절 이후의 배터리를 구성했다. 후루사와 겐지를 포함해 세 명이서 자주 함께 행동했을 뿐만 아니라 다부치가 세이부에의 트레이드와 관련하여 구단측에서 불려나온 날에도 세 명이서 골프를 했고 장소를 옮기면서 구단의 재건책에 대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호시노 센이치, 야마모토 고지와는 친구였다. 원래 대학 시절에 히로시마의 시골에서 나왔던 야마모토에게 다부치가 도쿄를 안내했던 것이 계기가 되면서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이들 두 사람과 도미타 마사루와 함께 ‘호세이 대학 3인방’이라고 불릴 정도로 너무나도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호시노가 질투해서 끼어들었다.[115] 현역 시절 히로시마로 원정갔을 때에는 적군과 아군으로 갈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마모토와 함께 식사를 하거나 야마모토의 집에 놀러가기도 했다고 한다.
다부치 자신은 공사 혼동을 피하기 위해 한신 코치 시절에는 호시노와의 친구 관계를 버리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호시노를 다룬 닛폰 TV 계열의 《슈퍼 TV》에서는 세 사람의 회식과 숨겨진 에피소드도 튀어 나오는 담소가 방송됐는데 이 안에서는 완전한 친구 관계였다. 한신 코치직에서 물러날 당시의 기자회견에서 “드디어 지금부터는 예전처럼 ‘'''센 짱'''’(仙ちゃん일본어, 호시노를 이렇게 불렀다) 이라고 불러서 보통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힘내라!! 다부치군!!》이 애니메이션 영화화됐을 때 이 만화의 주인공 다부치의 목소리를 연기한 니시다 도시유키와는 니시다 자신이 한신 팬이었던 것도 있어서 친분이 깊어졌다. 그러한 인연으로 니시다가 ‘국장’으로 근무하는 아사히 방송의 《탐정! 나이트 스쿠프》에 다부치도 이 프로그램 고문으로서 부정기적으로 출연하고 있다. 또, 니시다 주연의 영화 《낚시 바보 일지》에 다부치에게 출연을 의뢰한 적도 있었지만 출연이 성사되지 못한 채 시리즈가 그대로 종료됐다.
7. 부상 일지
다부치는 현역 시절 잦은 부상과 질병에 시달렸다. 다음은 그가 겪은 부상 및 질병 일지이다.
연도 | 부상 및 질병 내용 |
---|---|
1969년 | 왼쪽 팔꿈치 타박상 |
1970년 | 요통, 오른쪽 발목 염좌, 왼쪽 측두부 사구(이 부상으로 왼쪽 귀 난청을 겪음)[86] |
1971년 | 급성 신장염, 왼쪽 손목·왼쪽 발 타박상 |
1972년 | 왼쪽 손목 타박상, 두부 타박상 |
1973년 | 급성요근통(3회) |
1974년 | 왼손 관절 좌상, 왼쪽 전완 타박상, 오른쪽 팔꿈치 관절 좌상 |
1975년 | 오른쪽 다리 좌상 |
1976년 | 오른쪽 무릎 타박상, 좌측 두부 타박상 |
1977년 | 왼쪽 팔꿈치 통증, 오른손 엄지 골절 |
1978년 | 요통 |
1979년 | 아킬레스건 통증 |
1980년 | 앞쪽 두부 타박상, 오른쪽 무릎 타박상 |
1981년 | 오른쪽 무릎 타박상(2회) |
1983년 | 왼손 척골 하단 골절 |
1984년 | 화분증 |
1970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서 투수 소토코바 요시로가 던진 공에 왼쪽 관자놀이를 맞아 왼쪽 귀 난청을 겪었다.[86] 이 부상은 다부치의 체질을 변화시켰다고 알려질 만큼 컸으며, 이후 체중이 불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71년에는 급성 신장염으로 입원 치료를 받았다.
잦은 부상으로 인해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한 시즌도 많았으며, 신장염 치료 당시 투약 치료가 비만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 사다하루는 다부치에 대해 "순간적 폭발력은 대단했지만 부상이 많았다"고 평가했다.[116]
8. 상세 정보
다부치 고이치는 현역 시절 잦은 부상과 질병에 시달렸다. 다음은 그의 부상 이력이다.
연도 | 부상 및 질병 |
---|---|
1969년 | 왼쪽 팔꿈치 타박상 |
1970년 | 요통, 오른쪽 발목 염좌, 좌측 두부 타박상(이 부상으로 왼쪽 귀 난청) |
1971년 | 급성 신장염, 왼쪽 손목 및 발목 타박상 |
1972년 | 왼쪽 손목 타박상, 두부 타박상 |
1973년 | 급성요근통(3회) |
1974년 | 왼손 관절 좌상, 왼쪽 전완 타박상, 오른쪽 팔 관절 좌상 |
1975년 | 오른쪽 다리 좌상 |
1976년 | 오른쪽 무릎 타박상, 좌측 두부 타박상 |
1977년 | 왼쪽 팔꿈치 통증, 오른손 엄지 골절 |
1978년 | 요통 |
1979년 | 아킬레스건 통증 |
1980년 | 앞쪽 두부 타박상, 오른쪽 무릎 타박상 |
1981년 | 오른쪽 무릎 타박상(2회) |
1983년 | 왼손 척골 하단 골절 |
1984년 | 화분증 |
잦은 부상으로 인해 타이틀 획득에 실패한 시즌도 많았으며, 신장염 치료 약물 부작용으로 비만이 되기도 했다. 1975년과 1976년을 제외하면 시즌 전 경기 출장 기록이 없다. 오 사다하루는 다부치에 대해 "순간적인 폭발력은 대단했지만 부상이 많았다"고 평가하며, 타이틀 경쟁에 있어서는 부상이 적었던 야마모토 고지나 기누가사 사치오가 더 위협적이었다고 회상했다.[116]
다부치는 선수 시절 통산 474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역대 11위에 올랐다. 홈런 1개를 치는 데 필요한 타수는 오 사다하루에 이어 두 번째로 적을 정도로 효율적인 타격을 했다.
성명 | 홈런 | 경기수 | 타수 | 홈런률 |
---|---|---|---|---|
오 사다하루 | 868 | 2381 | 9250 | 10.66 |
다부치 고이치 | 474 | 1739 | 5881 | 12.41 |
알렉스 카브레라 | 357 | 1239 | 4510 | 12.63 |
나카무라 다케야 | 303 | 1172 | 3943 | 13.01 |
터피 로즈 | 464 | 1674 | 6274 | 13.52 |
마쓰이 히데키 | 332 | 1268 | 4572 | 13.77 |
나가이케 도쿠지 | 338 | 1449 | 4872 | 14.41 |
기요하라 가즈히로 | 525 | 2338 | 7814 | 14.88 |
오치아이 히로미쓰 | 510 | 2236 | 7627 | 14.95 |
1983년에는 타격 부진에도 불구하고 82경기 출전에 30홈런을 기록하며, 프로 야구 최초로 ‘규정 타석 미달 30홈런’을 달성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 1973년에는 시즌 37홈런 중 16개를 요미우리전에서 기록했고, 한 경기 3홈런을 두 차례나 기록한 것도 모두 요미우리전이었다. 또한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5경기 연속 9홈런, 7타수 연속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현역 시절 삼진이 적은 선수로도 알려져 있으며, 한 시즌에 100개 이상의 삼진을 기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공식전에서 희생 번트는 한 개도 없었다. 일본 야구계에서 통산 400홈런 이상을 기록하면서도 2000안타에 도달하지 못한 일본인 선수는 다부치와 야마사키 다케시 두 명뿐이다.
다부치는 호세이 대학 시절부터 등번호 22번을 사용했으며, 한신 타이거스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모두 22번을 사용했다. 대학 통산 홈런 개수와 신인 시절인 1969년 시즌 홈런 개수가 모두 22개였을 정도로 22라는 숫자와 인연이 깊다.
8. 1. 출신 학교
호세이 대학 제1 고등학교(현재의 호세이 대학 중학 고등학교)[82]호세이 대학 경제학부[82]
8. 2. 선수 경력
田淵 幸一|다부치 고이치일본어는 1968년 드래프트에서 한신 타이거스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입단 첫 해인 1969년부터 주전 포수로 활약하며 22개의 홈런을 기록, 포수로서는 처음으로 신인왕을 수상했다.[19] 그러나 1970년 8월 2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서 소토코바 요시로 투수의 공에 왼쪽 관자놀이를 맞아 쓰러지는 부상을 당했다.[20] 이 부상은 "다부치의 체질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고 할 정도로 심각했고, 이후 타격 폼을 '한발타법'(一本足打法일본어)으로 바꾸면서 비거리가 늘어났다.1972년에는 34개의 홈런을 기록했고, 에나쓰 유타카와의 콤비를 이뤄 '''황금 배터리'''(黄金バッテリー일본어)라는 애칭을 얻었다. 1973년 4월부터 5월에는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7타수 연속 홈런이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날짜 | 구장 | 상대 투수 | 이닝 | 내용 | |
---|---|---|---|---|---|
1 | 4월 26일 | 고라쿠엔 구장 | 세키모토 시토시 | 6회 | 좌측 관중석 3점 홈런 |
2 | 4월 26일 | 고라쿠엔 구장 | 스가와라 가쓰야 | 8회 | 좌측 관중석 4호 3점 홈런 |
3 | 4월 26일 | 고라쿠엔 구장 | 스가와라 가쓰야 | 9회 | 5호 3점 홈런 |
4 | 5월 9일 | 한신 고시엔 구장 | 다카하시 요시마사 | 2회 | 좌측 관중석 9호 솔로 홈런 |
― | 5월 9일 | 한신 고시엔 구장 | 다카하시 요시마사 | 4회 | 몸에 맞는 볼 |
5 | 5월 9일 | 한신 고시엔 구장 | 다카하시 요시마사 | 7회 | 좌측 관중석 10호 2점 홈런 |
6 | 5월 9일 | 한신 고시엔 구장 | 다카하시 요시마사 | 9회 | 중견수 쪽 11호 솔로 홈런 |
7 | 5월 10일 | 한신 고시엔 구장 | 다카하시 가즈미 | 1회 | 좌측 관중석 12호 2점 홈런 |
1974년에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출전, 히라마쓰 마사지에게서 2점 홈런을 기록하는 투혼을 보였다. 1975년에는 43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오 사다하루의 14년 연속 홈런왕 타이틀을 저지하고 첫 타이틀을 획득했다.[24]
1978년 시즌 후, 세이부 라이온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한신에서 다부치와 후루사와 겐지 2명, 크라운에서 마유미 아키노부, 다케노우치 마사시, 와카나 요시하루, 다케다 마사후미 4명이 জড়িত된 대형 트레이드였다. 이적 후 몸을 다시 단련한 다부치는 1980년 1루수와 지명 타자로 활약하며 5년 만에 40홈런 이상(43홈런)을 기록했다. 1982년과 1983년에는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1983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일본 야구계 최고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1984년 시즌을 끝으로 16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8. 3. 지도자·기타 경력
1985년부터 5년 동안 TBS(텔레비전·라디오)의 야구 해설위원을 맡았다.[89] 1990년에 스기우라 다다시의 후임으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90] 빙그레 이글스와 합동 가을 캠프를 진행하던 중[91] 빙그레의 신예 거포 장종훈을 스카우트하려 했으나[92] 여러 사정으로 무산되었다. 부임 첫 해, 팀은 순위, 타율, 홈런, 득점, 실점, 평균 자책점 모두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다.[93] 특히 시즌 85패와 승률 3할 2푼 5리는 양대 리그 출범 이후 구단 최악의 기록이었다.[94] 1991년에는 5위, 1992년에는 4위를 기록하는 등 부진이 계속되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93] 1993년부터 2001년까지 다시 TBS 해설자를 맡았다.2002년, 현역 시절 친정팀인 한신 타이거스의 수석 겸 타격 코치로 발탁되어 이듬해인 2003년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2003년 시즌 종료 후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자 "나는 감독과 일련탁생(一蓮托生일본어)"이라며 자신도 퇴단했다.
2004년, 세 번째로 TBS 야구 해설위원으로 복귀했고, TBS 시절에는 모두 스포츠 닛폰 평론가로도 함께 활동했다. 2007년 1월 29일, 호시노 센이치가 베이징 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다시 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지휘 하에 수석 겸 타격 코치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대표팀은 4위에 그쳤고, 팀 타율 2할 3푼 3리는 결승 토너먼트에 출전한 4개국 중 최저, 장타율 3할 6푼 2리는 타율과 함께 최악의 기록이었다.[106]
2011년, 호시노 센이치가 감독으로 취임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수석 코치 겸 타격 코치로 부임했다. (호시노가 라쿠텐 구단에 다부치의 코치 초빙을 요청) 한신 타이거스와 베이징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에 이어 라쿠텐에서도 호시노 센이치를 보좌하게 되었다. 그러나 팀이 극심한 타격 부진에 빠지면서 6월 5일부로 타격 코치에서 수석 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고,[107] 이듬해인 2012년에도 수석 코치를 맡았지만, 2012년 시즌 종료 후 라쿠텐을 퇴단했다.[108]
2013년, TBS TV·라디오 야구 해설자, 스포츠 닛폰 야구 평론가로 복귀했다.
;지도자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1990년 ~ 1992년)
- 한신 타이거스 1군 타격 수석 코치(2002년 ~ 2003년)
- 베이징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 수석 코치 겸 타격 코치(2007년 ~ 2008년)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1군 수석 코치 겸 타격 코치(2011년)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1군 수석 코치(2011년 6월 5일 ~ 2012년)
;해설자
- TBS 야구 해설위원(1985년 ~ 1989년, 1993년 ~ 2001년, 2004년 ~ 2010년, 2013년 ~ )
- 스포츠 닛폰 평론가(1993년 ~ 2001년, 2004년 ~ 2010년, 2013년 ~ )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1990년 | 다이에 | 6위 | 130 | 41 | 85 | 4 | .325 | 40.0 | 116 | .251 | 5.56 | 44세 |
1991년 | 5위 | 130 | 53 | 73 | 4 | .421 | 29.0 | 152 | .253 | 4.74 | 45세 | |
1992년 | 4위 | 130 | 57 | 72 | 1 | .442 | 24.0 | 139 | .258 | 4.60 | 46세 | |
통산: 3년 | 390 | 151 | 230 | 9 | .396 | B클래스: 3회 |
- 1990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8. 4. 수상·타이틀 경력
다부치 고이치는 선수 시절 다음과 같은 상을 받았다.상 |
---|
홈런왕 (1975년) |
신인왕 (1969년) |
베스트 나인 5회 (1972년 ~ 1976년)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2회 (1973년, 1974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983년) |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우수 선수상 (1982년) |
월간 MVP 2회 (1975년 4월, 1983년 5월) |
쇼리키 마쓰타로상 (1983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20년) |
8. 4. 1. 타이틀
홈런왕: 1회(1975년)[87]8. 4. 2. 수상
연도 | 수상 내용 |
---|---|
1969년 | 신인왕 |
1972년 ~ 1976년 | 베스트 나인 (5회) |
1973년, 1974년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2회) |
1975년 4월 | 월간 MVP |
1982년 |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우수 선수상 |
1983년 | 쇼리키 마쓰타로상 |
1983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
1983년 5월 | 월간 MVP |
2020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
8. 5. 개인 기록
다부치는 ‘홈런 아티스트’(ホームラン・アーチスト일본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장타력을 보였다. 특히 바깥쪽 공에 강했는데, 왼팔이 오른팔보다 3cm 더 긴 신체적 특징이 장타력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타석에서는 냉정함을 유지하며 많은 볼넷을 골라내는 선구안도 뛰어났다. 통산 474홈런은 역대 11위의 기록이며, 홈런 1개를 치는 데 필요한 타수가 오 사다하루에 이어 두 번째로 적을 정도로 효율적인 타격을 했다.
성명 | 홈런 | 경기수 | 타수 | 홈런률 |
---|---|---|---|---|
오 사다하루 | 868 | 2381 | 9250 | 10.66 |
다부치 고이치 | 474 | 1739 | 5881 | 12.41 |
알렉스 카브레라 | 357 | 1239 | 4510 | 12.63 |
나카무라 다케야 | 303 | 1172 | 3943 | 13.01 |
터피 로즈 | 464 | 1674 | 6274 | 13.52 |
마쓰이 히데키 | 332 | 1268 | 4572 | 13.77 |
나가이케 도쿠지 | 338 | 1449 | 4872 | 14.41 |
기요하라 가즈히로 | 525 | 2338 | 7814 | 14.88 |
오치아이 히로미쓰 | 510 | 2236 | 7627 | 14.95 |
1983년에는 타격 부진에도 불구하고 82경기 출전에 30홈런을 기록하며, 프로 야구 최초로 ‘규정 타석 미달 30홈런’을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 1973년에는 시즌 37홈런 중 16개를 요미우리전에서 기록했고, 한 경기 3홈런을 두 차례나 기록한 것도 모두 요미우리전이었다. 또한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5경기 연속 9홈런, 7타수 연속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시이 히사이치의 《힘내라!! 다부치군!!》에서는 짧은 다리로 ‘또박또박’ 달리는 모습이 그려져 ‘타부런’(다부치의 런닝 홈런)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준족이었다고 한다.
현역 시절 삼진이 적은 선수로도 알려져 있으며, 한 시즌에 100개 이상의 삼진을 기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공식전에서 희생 번트는 한 개도 없었다.
일본 야구계에서 통산 400홈런 이상을 기록하면서도 2000안타에 도달하지 못한 일본인 선수는 다부치와 야마사키 다케시 두 명뿐이다.
8. 5. 1. 첫 기록
- 첫 출장: 1969년 4월 12일, 대 다이요 웨일스 1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9회말에 에나쓰 유타카의 대타로 출장[4]
- 첫 타석: 상동, 9회말에 히라마쓰 마사지 앞에서 삼진[4]
- 첫 선발 출장: 1969년 4월 13일, 대 다이요 웨일스 3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7번·포수로서 선발 출장[4]
- 첫 안타·첫 홈런·첫 타점: 상동, 6회말에 이케다 시게키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4]
8. 5. 2. 기록 달성 경력
- 통산 100홈런: 1973년 4월 26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3차전(고라쿠엔 구장), 9회초에 스가와라 가쓰야로부터 좌월 3점 홈런 ※역대 75번째[86]
- 통산 150홈런: 1974년 6월 15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9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9회초에 아사노 게이시로부터 좌월 동점 솔로 홈런 ※역대 37번째[86]
- 통산 200홈런: 1975년 6월 19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3차전(주니치 스타디움), 7회초에 마쓰모토 유키쓰라로부터 중월 솔로 홈런 ※역대 21번째[87]
- 통산 250홈런: 1976년 9월 14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9차전(고라쿠엔 구장), 1회초에 가토 하지메로부터 좌월 3점 홈런 ※역대 12번째[86]
- 통산 1000경기 출장: 1977년 8월 31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3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4번·1루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195번째[86]
- 통산 300홈런: 1978년 6월 5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8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5회초에 이하라 신이치로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역대 10번째[86]
- 통산 1000안타: 1978년 8월 17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2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9회초에 마쓰바라 아키오로부터 중전 안타[86]
- 통산 350홈런: 1980년 4월 29일, 대 롯데 오리온스 전기 5차전(미야기 구장), 1회초에 니시나 도키나리로부터 좌월 선제 2점 홈런 ※역대 9번째[86]
- 통산 400홈런: 1981년 9월 6일, 대 롯데 오리온스 후기 10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9회말에 무라타 조지로부터 좌월 2점 홈런 ※역대 7번째[86]
- 통산 1500경기 출장: 1982년 6월 1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전기 9차전(고라쿠엔 구장), 5번·지명타자로서 선발 출장 ※역대 71번째[86]
- 통산 1000타점: 1982년 9월 14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후기 8차전(닛폰 생명 구장), 3회초에 이모토 다카시로부터 중전 적시타 ※역대 16번째[86]
- 통산 450홈런: 1983년 6월 11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10차전(고라쿠엔 구장), 6회초에 사토 세이이치로부터 좌월 2점 홈런 ※역대 6번째[86]
- 통산 3000루타: 1983년 7월 2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12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4회말에 야마무라 다쓰야로부터 좌중간에 2점 홈런 ※역대 23번째[86]
- 통산 1500안타: 1984년 5월 11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6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5회말에 스즈키 게이시로부터 투수 앞 내야 안타 ※역대 48번째[86]
8. 5. 3. 기타
- 올스타전 출장 11회(1969년 ~ 1976년, 1978년 ~ 1979년, 1984년)
- 4타수 연속 홈런(1973년 5월 9일 ~ 5월 10일)
- 13타석 연속 출루(1974년 8월 6일 ~ 8월 8일)
- 3이닝 연속 홈런: 1976년 8월 25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전(한신 고시엔 구장) 6회부터 8회에 걸쳐 솔로, 솔로, 2점 홈런 ※일본 프로 야구 역대 4번째[117]
8. 6. 등번호
- '''22''' (1969년 ~ 1984년)
- '''81''' (1990년 ~ 1992년)
- '''88''' (2002년 ~ 2003년, 2011년 ~ 2012년)
호세이 대학 시절부터 사용한 등번호는 22번으로, 한신과 세이부 시절 모두 22번을 사용했다. 다부치는 22라는 숫자와 인연이 깊은데, 대학 통산 홈런 개수와 신인 시절인 1969년 시즌 홈런 개수가 모두 22개였다.
다부치가 세이부로 이적한 후인 1983년, 한신은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비어있던 22번을 기도 가쓰히코에게 주었다. 이후 세키카와 고이치(21번에서 변경), 나카타니 진(66번으로 변경)까지 포수가 이 번호를 사용했고, 기다 고(외야수였지만 대학 시절 포수, 55번으로 변경), 마이크 킨케이드(내야수, 미국에서 포수 경험) 등 포수 경험이 있는 야수들이 이어받았다. 2005년부터는 후지카와 규지(~ 2012년), 오승환(2014년 ~ 2015년) 등 투수가 착용하고 있다.
세이부에서는 다부치 이후에도 22번을 포수가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포수 외에는 유키자와 히사타카(내야수, 1988년에만), 시미즈 요시유키(내야수), 오카모토 아쓰시(투수, 2012년에 59에서 변경) 등 3명만이 착용했다. 와다 가즈히로(외야수, 5번으로 변경)도 포수 겸임 시절 22번을 달았다.
세이부의 전신인 니시테쓰·다이헤이요 클럽·크라운라이터 시절에는 1950년 가사이시 도쿠고로, 1951년 고토 히로유키 두 명만이 22번을 사용했고, 주로 투수가 착용했다. 주력 투수로는 다마쓰쿠리 요지(외야수, 17번으로 변경), 히가시다 마사요시(외야수), 요시오카 사토루(내야수, 다부치에게 22번을 양보하고 8번으로 변경) 등이 있었다. 훗날 프로 골퍼가 된 오자키 마사시(투수 → 내야수)도 이 번호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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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神は巨人に敗れ3連敗 ドラ1森下がOP戦3号も先発西純が5回5失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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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神・ドラ1森下 岡田超え!OP戦球団新人右打者最多タイ3号 宿敵G撃ち 侍刺激「日本を代表する選手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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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球】過去104人が務めた“猛虎の4番”最も多く本塁打を打ったの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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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淵幸一氏 阪神での73年V逸があったから「今がある」…盟友・星野に敗れ巨人に逆転V許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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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球殿堂入りの田淵幸一氏 記録よりも記憶に残る「アーチス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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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淵幸一の我が道⑫、非常識な阪神な未練は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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ホームランだけが人生だ プロ野球ファンに捧げる豪打一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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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役時の野村克也氏 田淵幸一氏を「こいつダメ」と感じた瞬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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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淵氏殿堂入り「阪神球史に残る大打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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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終話【大事なのは〇〇】日ハム・新庄剛志監督、中日・立浪和義監督。レジェンドふたりはどうみて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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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ブチくんが田淵氏祝福「殿堂入り当然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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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淵幸一氏「『おい早いよ』と言いたい」 星野さんと背番号まで長生きする約束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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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データ】村上宗隆プロ野球新5打席連続本塁打 20人「打数」と13人「打席」の両方を更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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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다카하시에게 신기록이 되는 23개째 홈런을 맞은 투수가 다부치의 모교인 호세이 대학 소속으로 훗날 프로에서 다부치와 같은 한신에 입단하게 되는 [[안도 유야]]였다. 안도는 호세이 대학 야구부의 신년회에 다부치에게서 “너는 엄청난 일을 해 줬다”라는 말을 듣고 이후 안도는 다부치에게 사죄의 의미를 담아 [[오추겐]]이나 [[오세보]]를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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